[임병을 벤처텔링] 복수의결권 제도, 있는데 왜 쓸 수가 없는가스페이스X는 머스크에게 의결권 85%를 몰아주는데, 한국 창업자는 왜 안되는 것인가
[임병을 · 넥스트그로스 대표] 최근 필자는 자문하고 있는 한 기업의 정관을 전면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규모있는 투자유치를 준비하는 회사였고,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창업자 지분이 빠르게 희석될 수 있는 구조와 아직 정관에 투자와 연관하여 주식 및 경영권 관련 사항이 미비한 점이 주요 제약요인으로 떠올랐다.
몇가지 개선안을 검토하면서 정관에 복수의결권주식 발행 근거 조항을 함께 반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항을 넣는 작업을 마치고 나서 든 생각은 묘했다.
제도는 분명 있는데, 정작 이 회사가 그 제도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시점이 올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복수의결권' 제도의 필요성과 동시에, 그 유명무실함을 같은 자리에서 체감한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시장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2026년 IPO 최대어로 꼽히는 미국 스페이스X가 비공개 제출한 투자설명서에는 차등의결권(dual-class) 구조가 담겼다.
일반 투자자에게 돌아가는 클래스A 주식은 1주당 의결권 1개, 일론 머스크 등 내부자가 보유하는 클래스B 주식은 1주당 의결권 10개다.
머스크는 현재 클래스A 12.3%, 클래스B 93.6%를 보유해 전체 의결권의 약 85%를 장악하고 있으며, 상장 후에도 CEO·CTO·이사회 의장직을 그대로 유지한다. 추정 기업가치 1조 7,500억 달러, 조달 예정금액 75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IPO가 차등의결권 위에 설계되어 있다는 뜻이다. 미국 시장은 이런 구조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쿠팡이 한국이 아닌 뉴욕증권거래소를 택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한국에도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23년 11월부터 시행된 벤처기업법은 비상장 벤처기업의 창업주에게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이 부여된 복수의결권주식 발행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 2년이 훌쩍 지난 2026년 5월 현재, 실제 복수의결권을 발행한 기업은 하이리움산업과 콜로세움코퍼레이션 등 손에 꼽는 수준에 그친다.
최근 하이리움산업이 코스닥 기술특례상장에 재도전하면서 한국거래소가 '최다의결권자' 개념을 상장 규정에 반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 회사가 상장에 성공하면 국내 복수의결권 상장 첫 사례가 된다. 제도 시행 2년이 지나서야 첫 상장 사례를 준비하는 수준이라는 것이, 한국 복수의결권 제도의 현주소다.
왜 이렇게 활용이 저조한가. 자문 과정에서 확인한 현실적 장벽은 세 가지다.
첫째, 발행 요건 자체가 까다롭다. 누적 100억 원 이상 투자, 마지막 라운드 50억 원 이상의 지분투자가 필요하고, 그 결과 창업주 지분이 30% 이하로 떨어지거나 최대주주 지위를 잃는 경우에만 검토할 수 있다. 정관 변경과 발행 결의에는 발행주식총수의 4분의 3 동의가 필요하다. 정작 보호가 필요한 시점에는 이미 기존 투자자들의 동의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다.
둘째, 상장 후 3년 일몰 규정이다. 어렵게 복수의결권을 발행해도 상장 3년이 지나면 보통주로 자동 전환된다. 창업자가 가장 경영권을 지키고 싶은 시기, 즉 상장 직후 사모펀드나 외부 세력의 압박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보호 장치가 사라진다. 머스크가 스페이스X 상장 후에도 의결권 85%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미국 구조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셋째, 사회적 인식이다. 차등의결권은 한국에서 여전히 '재벌 세습의 변형'으로 의심받는다. 상법상 상장사 차등의결권 도입 논의는 소액주주 권한 강화 흐름에 밀려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벤처 창업자가 활용할 수 있는 시점은 비상장 단계의 짧은 구간뿐이고, 그마저도 제한된 요건 안에서만 가능하다.
작년에 자문을 했던 회사 중 몇 곳은 상장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대표자의 지분율이 30% 미만으로 낮은 것이 이슈가 되었다. 복수의결권을 적용하는 것도 복잡한 상황이었기에 결국은 기존 주주의 지분을 비싼 값에 사오거나 상장을 사실상 포기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으며, 결국 상장을 일단 미뤘다.
창업자와 투자자가 점검해야 할 것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정관과 주주간계약에 복수의결권 발행 가능성을 사전에 반영해두었는가. 발행 요건이 충족되는 시점에 비로소 논의를 시작하면 이미 늦다.
둘째, 우리 회사의 회수 전략이 국내 상장만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상장 3년 일몰을 감안하면 미국 상장 가능성까지 함께 열어두는 자본구조 설계가 필요할 수 있다.
셋째, 복수의결권을 단순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아니라, 장기적 의사결정 권한과 책임을 정렬하는 도구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권한이 강해진다는 것은 책임도 그만큼 무거워진다는 뜻이다.
제도의 개선 방향도 분명하다. 발행 요건 완화, 상장 후 일몰 기간의 합리적 연장(최소 5~7년), 상장사 차등의결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 재개, 그리고 무엇보다 거래소 상장 규정의 정비. 하이리움산업의 사례를 계기로 거래소가 '최다의결권자' 개념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출발이지만, 갈 길은 멀다.
스페이스X는 머스크에게 의결권 85%를 몰아주며 1조 7,500억 달러짜리 IPO를 준비하고 있고, 한국의 창업자는 손에 든 제도가 있어도 그것을 쓸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정관에 한 줄을 넣고 있다.
제도가 있다는 것과 제도가 작동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 벤처 생태계가 정말로 '제3 벤처붐'과 '벤처 4대 강국'을 말하고자 한다면, 창업자의 장기 시계(視界)를 지켜줄 수 있는 지배구조 도구부터 작동시켜야 한다. 도구함 안에 망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못이 박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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